교회 역사
제31장: 올바른 방향


제31장

올바른 방향

이미지
고대 메소아메리카 피라미드

1945년 10월 7일 오후,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연차 대회에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솔트레이크 태버내클 장내는 고요했다. 사도로 봉사한 지난 40여 년 동안 그는 태버내클에서 여러 차례 말씀을 했었지만, 주님의 선지자로서 온 교회에 말씀을 하는 것은 이번 대회가 처음이었다.

그는 아이다호 남동부에 있는 아이다호폴스 성전을 헌납하고 막 돌아왔다. 그 성전은 후기의 사업이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지만 스미스 회장은 전 세계의 성도들이 수년간 이어진 빈곤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성도들은 인도와 확신을 얻기 위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미스 회장은 청중에게 말했다. “인간의 자녀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분의 조언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세상은 오래전에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구주의 권고를 상기시키며 이렇게 선언했다. “그것이 바로 구속주의 참뜻입니다. 또한 언젠가 그분의 면전에 서서 그분으로부터 영광스러운 귀환 환영을 받기를 바라는 모든 후기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마음가짐입니다.”1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 스미스 회장은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로 알려져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삶에 지침이 되어 줄 개인 신조를 작성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이상에 부응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하지 않고, 그들이 옳은 일을 하도록 사랑으로 인도하겠다. 나는 내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의로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친절을 베풀고 내 친구로 삼으려 노력하겠다.”2

이제 스미스 회장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특히 전쟁으로 삶이 산산조각 난 성도들을 어떻게 도울지를 염려했다. 그해 초, 그는 교회 복지 위원회에 유럽으로 식량과 의복을 보낼 계획을 세워 달라고 요청했었다. 10월 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몇몇 사도들을 만나 그 물품들을 가능한 한 빨리 외국으로 운송할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3

유럽에 원조를 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교회는 수많은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호 활동을 조율하기 위해 미국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스미스 회장은 여러 세부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몇몇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워싱턴 디시로 갔다.4

11월 초의 어느 흐린 날 아침, 그들은 미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여러 정부 관리와 유럽 대사들을 만났으며, 그중에는 미국 대통령인 해리 에스 트루먼과의 약속도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교회 지도자들을 정중하게 맞이했지만, 유럽 경제가 좋지 않고 통화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식량과 의복을 유럽으로 수송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스미스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돈은 쓸모가 없습니다.”5

선지자는 교회가 보상을 바라며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그곳에 있는 우리 회원들은 식량과 보급품이 필요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6

“준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트루먼 대통령이 물었다.

선지자는 대답했다. “지금 바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게 성도들이 창고에 모아 놓은 식량과 물품에 대해 말해 주고, 그와 더불어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전쟁 기간 동안 바느질로 2천 장이 넘는 누비이불을 만든 일도 자세히 설명했다. 교회는 그저 이 물품들을 유럽으로 운송하는 데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성도들의 준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계시군요. 어떤 방법으로든 기꺼이 돕겠습니다.”7

자리를 떠나기 전, 스미스 회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후기 성도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선지자는 그에게 가죽 장정이 된 소책자 『경고의 음성』[A Voice of Warning]을 건넸다. 이 전도용 소책자는 1837년에 사도 팔리 피 프랫이 쓴 것이었다.

스미스 회장의 머릿속에 갑자기 프랫 장로 시대의 성도들은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은 결코, 대양 건너 고통을 겪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원조를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주님은 성도들에게 고난의 시기에 대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스미스 회장은 이제 성도들이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했다.8


교회가 유럽으로 원조 물품을 실어 보낼 준비를 하는 동안, 헬가 버트는 베를린에서 계속해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독일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베를린을 포함한 나라 전체가 각기 다른 점령국이 관할하는 네 개 지역으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독일 성도들은 전쟁으로 집을 잃은 상태라, 그들은 선교부 본부에 있는 헬가와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았다. 독일 동부의 선교부 회장 대리였던 헤베트 클로파가 소련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으므로,그의 보좌인 파울 랑하인리히와 리하트 랑락이 난민들을 보살피는 활동을 이끌었다.

선교부 본부에는 이 성도들을 수용할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파울과 리하트는 군부 지도자들로부터 베를린 서부의 미국 관할 지역에 있는 버려진 대저택으로 선교부 본부를 옮기기 위한 허가를 받아 냈다. 한편 헬가의 고향 틸지트는 소련의 관할 지역이었으므로, 헬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군사 작전 중에 실종된 남동생 헨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친구들과 예전 지부 회원들의 행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9

1945년 가을에 헬가는 루셔 이모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헬가의 외조부모와 니타 이모가 사망한 공습에서 헬가와 루셔가 살아남은 지도 1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제, 헬가는 루셔와 다른 독일 난민들이 독일과 폴란드 사이 국경 근처의 버려진 성에 소련군에 의해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련 당국은 그들을 석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들을 받아들여 돌볼 수 있는 친척이 있을 경우에만 그렇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헬가는 곧바로 이모에게 선교부 본부에서 생활하도록 초청하는 답장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셔는 함께 수감되었던 먼 친척인 이파라는 여성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왔다. 둘 다 야위고 수척한 모습이었다. 헬가도 전쟁 동안 많은 굶주림과 고통을 겪었지만, 이모가 들려주는 고문과 궁핍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했다. 아기였던 이파의 딸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고, 루셔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다.10

다른 후기 성도 난민들도 선교 본부를 찾아왔고, 파울 랑하인리히는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다. 곧, 한 지붕 아래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숙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헬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독일에서 선교 사업을 했던 미군들은 자주 선교 본부를 찾아왔다. 한 군인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려고 샌드위치를 가져왔는데, 샌드위치는 미국에서 온 폭신한 흰 빵으로 만든 것이었다. 헬가는 샌드위치 하나를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하지만 그것은 헬가와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혹독한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때로 그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기도 했다. 헬가는 가까스로 먹을 것을 사거나 찾아 낼 때도 있었지만, 오래된 감자와 물이 섞인 우유는 영양가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너무 쇠약해져서 며칠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11

1946년 1월, 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헬가의 아버지 마틴 마이주스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 공습으로 왼쪽 눈을 잃었으며, 덴마크의 난민 수용소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었다. 이제 그는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에서 약 210킬로미터 떨어진 슈베린에 살고 있었다.12 파울과 선교부의 다른 지도자들은 몇 달 동안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난민이 된 성도들을 찾고 그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그룹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이미 슈베린도 방문할 계획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헬가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13

만원 열차에 몸을 실은 헬가는 깨진 유리창 사이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들이치자 온기를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녀는 미국 초콜릿이 몇 조각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초콜릿은 귀한 것이어서 아버지를 위해 아껴 두었던 것이었다. 헬가는 이따금 초콜릿의 달콤한 향을 들이마시기 위해 초콜릿을 코에 갖다 대었다.

슈베린에서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자, 헬가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다. 딸이 초콜릿을 건네자, 아버지는 무척 놀라며 딸과 나누어 먹으려고 했다. 그가 말했다. “Kindchen[킨트셴].” 얘야라는 뜻이었다.

헬가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빠. 저는 정말 많이 먹었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제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헬가는 기쁨으로 충만했다.14


지구 반대편에서,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점령군 중에는 닐 맥스웰이 속한 미 육군 사단도 있었다. 전쟁 동안에 수천 건의 공습과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으로 인해 일본은 초토화되었다. 닐은 일본인들이 자신을 승전국의 영웅으로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은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한 상태였다. 닐은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치른 희생을 알고는 몹시 괴로워했다.15

이제 닐은 군기가 빠지고 사기가 저하된 300명의 중대를 지휘하는 선임 하사관으로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그 중대의 많은 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닐은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었지만, 상관들은 닐이 중대에 질서를 확립할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닐은 확신이 없었다.16

그는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곳에서 원숙한 판단을 요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어요. 그 책임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사실 저는 그저 어린애일 뿐이에요. 심한 향수병에 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어린애일 뿐이라고요.”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도자로서 성공하고 일부 중대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자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다. 닐은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감하기 위해 홀로 바깥을 돌아다니며 많은 밤을 보냈다.18

그는 또한 동료 후기 성도 군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었다. 전쟁 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은 군 복무를 하는 성도들에게 함께 모여 성찬을 취하고 서로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도록 독려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물론 괌, 필리핀 등 세계 각지에서 수백 명의 후기 성도 군인들이 함께 모임을 했다.

이들은 예상치 못한 선교 사업 경험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탈리아에 있던 후기 성도 군인들은 카톨릭 교회의 총본산에서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교황에게 구주께서 서반구에 방문하신 이야기를 전하고 몰몬경도 한 권 선물했다.19

한편 일본에서는 수년 동안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현지 성도들이 군인 회원 그룹들을 찾아와 모임에 참석했다. 새로운 점령국 정부하에서 일본인들은 자유롭게 영적 믿음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고, 일부 후기 성도 군인들은 일본인 친구들에게 교회에 대해 알아볼 것을 권했다. 곧 닐과 같은 미군들은 적이었던 이들과 나란히 앉아 성찬을 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20

닐이 군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수개월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키나와에서 겪었고 지금 일본 본토에서 하고 있는 경험들은 가능한 한 빨리 선교사로 봉사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을 확고히 해 주었다.21

그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썼다.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자신들을 인도해 줄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어요.”22


한편 독일에서는 파울 랑하인리히가 베를린에 주둔한 소련군 지휘관에게 연락을 취했다. 수천 명의 후기 성도 난민들은 당시 소련 점령 지역에 살고 있었고, 파울은 그들의 안녕을 염려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해할 수 없는 히틀러의 행동 때문에 우리 회원들 다수가 추방되고 쫓겨나 집도 조국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았습니다.”

파울은 식량을 구입해서 성도들에게 수송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지휘관에게 요청했다. 또한, 과거에 독일 정부의 계보 조사원으로 일했던 그는 은닉처에 보관된 중요한 기록 수집물을 수색해도 되는지 문의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치는 그런 기록들이 훼손되거나 도난되지 않도록 독일의 외딴 지역에 숨겨 두었었다. 언젠가는 독일 성도들이 조상들을 위한 성전 사업을 하는 데 그 기록들이 필요할 것이므로, 파울은 그것들을 보존하고자 했다.

그는 지휘관에게 보내는 문서에 이렇게 썼다. “귀하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기록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23

일주일 후, 파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계보 기록에 관해서도 답변이 왔는데, 성도들이 그 기록을 찾을 수만 있다면 가져가도 좋다는 내용이었다.24

파울은 마침내 베를린 남서쪽에 있는 로덴부르크 성에 문서 더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6년 2월의 몹시 추웠던 어느 날, 파울과 16명의 현지 선교사들은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성을 향해 빙판길을 올랐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간 후, 교구 등록 문서와 마이크로필름, 독일인 계보가 들어 있는 책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25

많은 등록 문서들은 수 세기 전의 것으로, 수천 개의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으며, 일부는 아름다운 독일어 서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긴 두루마리들에는 선명한 색상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얼음과 눈에 덮여 있어 원상 복구가 불가능해 보이는 기록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록물은 상태가 양호했다.26

파울과 선교사들이 기록들을 확보했으므로, 이제는 그 기록을 언덕 아래로 안전하게 싣고 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파울은 빌린 트럭과 트레일러로 기록들을 베를린행 기차에 실을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트럭은 오지 않았다.27

마침내, 한 선교사가 언덕 위로 힘겹게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트럭이 오는 길에 빙판길에서 타이어가 헛돌아 꼼짝 못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28

파울은 기도가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세 명의 선교사에게 함께 숲으로 가자고 했다. 그들은 주님께 도움을 간청했다. 그들이 “아멘”이라고 말하는 순간,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커브를 도는 트럭이 보였다.

파울을 만난 트럭 기사는 성으로 오기 위해 트레일러를 떼어 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럭을 돌려서 떠날 작정이었다. 파울은 그에게 가지 말고 가능한 한 많은 기록을 미끄러운 도로 아래로 운반해 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트레일러 없이 트럭만으로 모든 기록을 운반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결국 다음 날 화물 열차가 오기 전까지 모든 기록을 가져오려면 도로 위의 얼음이 녹아야만 했다. 파울과 선교사들은 다시 한번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했다.29

그날 밤, 따뜻한 비가 내렸다. 파울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길 위의 얼음은 모두 녹아 있었다. 또한 그는 화물 열차가 며칠 지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선교사들은 원상 복구가 가능한 모든 기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었다. 파울은 일이 진행되는 놀라운 과정에서 하나님이 하신 역할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분의 도구로 쓰인 것에 감사해했다.

마지막 운반물이 기차역에 도착하자, 파울과 선교사들은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렸다. “저희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이제 이 화물 열차를 베를린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30


1946년 5월 22일, 멕시코 선교부 회장인 아르웰 피어스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과 함께 멕시코시티 북동쪽의 유명한 유적지인 태양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이 피라미드는 테오티우아칸으로 알려지게 된 고대 도시의 중심이었으며, 약 60미터 상공까지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루는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스미스 회장은 70대 후반이었지만, 피라미드를 이루는 많은 계단을 비교적 쉽게 오르며 일행인 아르웰과 선교사들에게 농담까지 건넸다.31

아르웰은 선지자가 멕시코에 와 준 것을 기뻐했다. 교회 회장이 멕시코의 선교부를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이 방문은 현지 성도들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멕시코의 교회는 주류 성도들과 제3차 협의회에 참여한 1,200명의 사람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스미스 회장의 방문은 아르웰이 지난 4년간 부단히도 노력해 왔던 진정한 화해의 기회가 되었다.32

1942년에 아르웰이 멕시코 선교부의 회장이 되었을 때, 제3차 협의회 회원들과 멕시코의 다른 성도들 사이의 분열의 골은 더욱더 깊어졌다. 아르웰이 제일회장단에게서 성별을 받았을 때, 제이 르우벤 클라크 회장은 그에게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임무를 주었다.33

처음에 협의회 회원들은 신임 선교부 회장을 믿지 않았다. 전임 선교부 회장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웰은 미국 시민이었고, 협의회 회원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웰은 그들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그들의 신뢰와 우정을 얻기로 결심했다.

아르웰은 제3차 협의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협의회의 지도자 아벨 파에스를 포함한 협의회 회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는 다시 단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협의회 회원들은 회복된 복음의 핵심 교리를 여전히 믿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 프로그램을 계속 시행했으며, 몰몬경도 믿었다. 아르웰은 성도들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무엇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는지 깨닫게만 해 준다면,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신중히 진행해야 했다.

그는 제일회장단에게 이렇게 알렸다. “과거에 했던 가혹한 방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친절을 보이고, 분별 있게 행동하고, 참을성 있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34

제일회장단의 지시에 따라, 아르웰은 멕시코에 여러 채의 예배당을 짓고 개조하는 일을 이끌었다. 이로써 협의회 회원들이 애초에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때 문제 삼았던 집회소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는 또한 아벨을 자주 만나 그에게 화해를 모색하도록 권했다. 그는 아벨과 협의회 회원들에게 말했다. “이곳 멕시코에서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스테이크 조직입니다. 우리가 더 큰 화합을 이루기 전까지는 멕시코에서 스테이크는 조직될 수 없을 것입니다.”35

그는 아벨에게 협의회 회원들이 성전 축복을 포기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1945년, 애리조나 메사 성전에서는 최초의 스페인어 엔다우먼트가 집행되었다. 비록 많은 멕시코 성도들은 메사까지 갈 형편이 못 되었지만, 아르웰은 언젠가 멕시코에도 성전이 생겨 아벨을 비롯한 많은 협의회 회원들이 성전에 갈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36

어느 날, 아르웰은 아벨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아벨과 제3차 협의회의 몇몇 지도자들은 아르웰과 만나 화해를 논의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거의 6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자신들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한 아벨과 다른 지도자들은 다시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제일회장단에 간청하기로 했다. 스미스 회장과 그의 보좌들은 그 요청을 검토한 뒤, 만약 협의회 회원들이 그 단체와 관계를 끊고 멕시코 선교부 회장을 기꺼이 지지한다면, 그들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다.37

이제, 아르웰은 스미스 회장과 함께 선교부를 둘러보면서, 교회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협의회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스미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모반은 없었습니다. 단지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38

1946년 5월 25일, 아르웰은 스미스 회장과 함께 멕시코시티의 에르미타 지부로 갔다.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곳에 모였다. 작은 예배당과 초과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대형 천막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제3차 협의회 회원들이었다. 일부 협의회 회원들은 스미스 회장이 자신들을 비난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그는 화합과 재결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후 대부분의 협의회 회원들은 교회로 완전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39

며칠 뒤 테칼코 시에서 열린 모임에는 거의 500명의 성도들이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아벨은 멕시코를 방문해 준 스미스 회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회중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교회의 총관리 역원과 멕시코 선교부 회장의 지도와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지자를 따르고 있습니다.”40

  1. George Albert Smith, in One Hundred Sixteenth Semi-annual Conference, 169–70; “Pres. Smith Gives Keynote to Sessions,” Deseret News, Sept. 29, 1945, Church section, [1]. 주제: George Albert Smith[조지 앨버트 스미스]

  2. Bryant S. Hinckley, “Greatness in Men,” Improvement Era, Mar. 1932, 35:269–72, 295–96; Whitney, Through Memory’s Halls, 309; Preston Nibley, “President George Albert Smith,” Relief Society Magazine, July 1945, 32:390–91.

  3. First Presidency to Marion G. Romney, July 12, 1945, First Presidency Letterpress Copybooks, volume 131; George Albert Smith, Journal, Oct. 18, 1945; Widtsoe, Diary, Oct. 18, 1945; Gibbons, George Albert Smith, 296.

  4. “Pres. Smith in East on Mission of Mercy,” Deseret News, Nov. 10, 1945, Church section, [1].

  5. George Albert Smith, Journal, Nov. 2–7, 1945; Widtsoe, Diary, Nov. 2–7, 1945; George Albert Smith, in One Hundred Eighteenth Semi-annual Conference, 5–6; Gibbons, George Albert Smith, 298.

  6. Gibbons, George Albert Smith, 298; George Albert Smith, in One Hundred Eighteenth Semi-annual Conference, 6.

  7. George Albert Smith, in One Hundred Eighteenth Semi-annual Conference, 6; “Pres. Smith Returns from Successful Trip to Capital,” Deseret News, Nov. 17, 1945, Church section, [1], 7; “Trademarks of Elder Anderson,” Deseret News, Apr. 25, 1970, Church section, 3; Anderson, Prophets I Have Known, 103.

  8. George Albert Smith, Journal, Nov. 2 and 3, 1945; George Albert Smith, in One Hundred Eighteenth Semi-annual Conference, 6.

  9.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108, 113, 117, 118, 123, 139; Minert, In Harm’s Way, 523–25; Minert, Under the Gun, 495, 503–4; Scharffs, Mormonism in Germany, 117; Minert, “Succession in German Mission Leadership,” 556, 558–61; Paul Langheinrich, Statement, Feb. 21, 1971, in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Feb. 20, 1943; Slaveski, Soviet Occupation of Germany, 151; Gross, Myth and Reality of German Warfare, 19–20. 주제: 독일

  10.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101–3, 123.

  11.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113, 115–16, 117; Paul Langheinrich, Statement, Feb. 21, 1971, in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Feb. 20, 1943.

  12. Birth, Mission Journal, Jan. 14 and 21, 1946;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118;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65.

  13. Ranglack, Langheinrich, and Neuman, “First Trip thru the Mission,” 1–3; Ranglack, Langheinrich, and Neuman, “Second Trip thru the Mission,” 1–4; “Report on the East German Mission as of 10 August 1945,” 1–4;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60–66; Birth, Mission Journal, Jan. 22, 1946.

  14.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120; Birth, Mission Journal, Jan. 26, 1946;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65.

  15. Maxwell, Personal History, box 1, folder 3, 14; Takagi, Trek East, 292; Clapson, Blitz Companion, 97–118; Maxwell, Oral History Interview [1999–2000], 32.

  16. Maxwell, Personal History, box 1, folder 3, 14; Maxwell, Oral History Interview [1999–2000], 32–34.

  17. Neal A. Maxwell to Clarence Maxwell and Emma Ash Maxwell, May 2, 1946, Neal A. Maxwell World War II Correspondence, CHL.

  18. Maxwell, Oral History Interview [1999–2000], 33–34; Neal A. Maxwell to “Dearest Family,” Mar. 27, 1946, Neal A. Maxwell World War II Correspondence, CHL.

  19. Takagi, Trek East, 294–95; Boone, “Roles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in Relation to the United States Military,” 655–65; “Reunions Slated during Conference,” Deseret News, Oct. 2, 1946, 12; “Okinawa Gathering in Castle,” Deseret News, July 21, 1945, Church section, 1; William Mulder, “Okinawa Conference,” Improvement Era, Dec. 1945, 48:734, 769; “Servicemen Report Okinawa Activities,” Deseret News, Feb. 16, 1946, Church section, 9; Maxwell, Oral History Interview [1999–2000], 32; Ricks, “Chaplain’s Diary,” 461–65.

  20. Takagi, Trek East, 293; Britsch, From the East, 82–85; Allred, “Missionary Role of LDS Servicemen in Occupied Japan,” 63–65; Maxwell, Oral History Interview [1999–2000], 31–32. 주제: 일본; Servicemember Branches[군인 지부]

  21. Maxwell, Oral History Interview [1999–2000], 31, 35; Maxwell, Personal History, box 1, folder 3, 12–13; Hafen, Disciple’s Life, 125.

  22. Neal A. Maxwell to “Dearest Ones,” Oct. 31, 1945, Neal A. Maxwell World War II Correspondence, CHL.

  23. Slaveski, Soviet Occupation of Germany, xii, 37; [Paul Langheinrich] to Georgy K. Zhukov, Aug. 9, 1945, copy, in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9, 1945; “Report on the East German Mission as of 10 August 1945,” 1;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84;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25; Paul Langheinrich, “Yesterday and Today,” Improvement Era, Sept. 1946, 49:569.

  24. Vasily D. Sokolovsky to Richard Ranglack, Aug. 16, 1945, in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16, 1945.

  25. Paul Langheinrich, “Report of Procurement of Church Records, Films and Photocopies,”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16, 1945; Kahlile Mehr, “Langheinrich Legacy,” Ensign, June 1981, 23–24;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26;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86.

  26. Paul Langheinrich, “Report of Procurement of Church Records, Films and Photocopies,”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16, 1945; Corbett, “Records from the Ruins,” 12–13.

  27.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26–27.

  28. Paul Langheinrich, “Report of Procurement of Church Records, Films and Photocopies,”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16, 1945;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26.

  29. Paul Langheinrich, “Report of Procurement of Church Records, Films and Photocopies,”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16, 1945;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85–87; Kahlile Mehr, “Langheinrich Legacy,” Ensign, June 1981, 23.

  30. Corbett, “Records from the Ruins,” 16; Paul Langheinrich, “Report of Procurement of Church Records, Films and Photocopies,”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Aug. 16, 1945. 주제: Family History and Genealogy[가족 역사 및 계보]

  31. George Albert Smith, Journal, May 22, 1946; Pierce, “Story of the Third Convention,” 4–5; Pérez de Lara, “Temple of the Sun,” 36–41; “An American Pyramid,” Brooklyn (NY) Daily Eagle, Aug. 25, 1935, B11.

  32. Pierce, “Story of the Third Convention,” 5; Carmen Richardson, “1,200 Mexican Members Return to Church during Pres. Smith’s Visit,” Deseret News, June 15, 1946, Church section, [1]; “The Life and Ministry of George Albert Smith,” in Teachings of Presidents of the Church: George Albert Smith, xxxiii–xxxiv; Tullis, Mormons in Mexico, 139, 145, 150–51, 157. 주제: Third Convention[제3차 협의회]

  33. Pierce, “Story of the Third Convention,” [1]; Arwell L. Pierce, Blessing, Aug. 13, 1942,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34. Pulido, “Solving Schism in Nepantla,” 92, 95–96; Tullis, Mormons in Mexico, 148, 150–52; Arwell L. Pierce to First Presidency, Nov. 9, 1942,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35. Arwell L. Pierce to First Presidency, Mar. 8, 1943–A; Mar. 8, 1943–B; Apr. 9, 1945; Oct. 10, 1945; First Presidency to Arwell L. Pierce, Apr. 19, 1943–A; Apr. 19, 1943–B; Nov. 29, 1943,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Pulido, “Solving Schism in Nepantla,” 97; Mexic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Mar. 31, 1943.

  36. Pulido, “Solving Schism in Nepantla,” 96–97.

  37. Arwell L. Pierce to First Presidency, Apr. 10, 1946; First Presidency to Abel Páez, May 9, 194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Tullis, “Shepherd to Mexico’s Saints,” 139–46.

  38. George Albert Smith, Journal, May 21 and 22, 1946; Pierce, “Story of the Third Convention,” 5; Herrera, Historia del Mormonismo en Mexico, 80–81.

  39. Arwell L. Pierce to J. Reuben Clark and David O. McKay, June 6, 194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Bravo, Oral History Interview, 28; George Albert Smith, Journal, May 25, 1946; Carmen Richardson, “1,200 Mexican Members Return to Church during Pres. Smith’s Visit,” Deseret News, June 15, 1946, Church section, [1].

  40. Arwell L. Pierce to J. Reuben Clark and David O. McKay, June 6, 194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