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들의 가르침
제 8 장: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제8장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주이시고, 주님이시며, 구주이십니다.”

고든 비 힝클리의 생애에서

1975년 4월 연차 대회에서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이었던 고든 비 힝클리 장로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나누었다.

“우리는 최근에 애리조나 [메사] 성전을 공개했습니다. 건물이 완전히 개축된 다음에, 약 2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내부를 관람했습니다. 공개한 첫날에는 다른 종파의 성직자들이 귀빈으로 초대되었는데, 수백 명이 이에 응했습니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그들이 다 둘러보고 난 뒤에, 저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떠한 질문에도 기꺼이 응답해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어느 신교도 성직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 건물을 다 둘러보았는데, 이 건물의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씌어 있더군요. 그런데,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상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전에도 이 교회의 건물을 본 일이 있지만, 역시 십자가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알고 있는데, 십자가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기독교 종파의 형제들이 교회의 첨탑이나 예배당의 단상에 십자가를 달아 놓거나 그들의 복장에 십자가를 달아 놓거나 그들의 복장에 십자가를 부착하고, 책에도 십자가를 새겨 놓는 것을 조금이라도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는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십자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의 생활이 우리 신앙의 뜻깊은 표현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이 우리 교회의 상징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 어떠한 증서나 어떠한 예술품이나 어떠한 형상으로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경이와 영광을 표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상징으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가 비열하고 거짓되고 무례한 짓으로 그의 상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선하고 품위 있고 고결한 행위로 우리가 받들고 있는 그의 이름의 상징을 더욱 빛나게 닦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자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간증하고 그것을 뜻깊게 표현하는 상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것으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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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우리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기본이 되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입니다. …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딴 … 교회의 으뜸되는 모퉁잇돌이십니다.”

고든 비 힝클리의 가르침

1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아들이시다.

우리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기본이 되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입니다. ……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딴 … 교회의 으뜸되는 모퉁잇돌이십니다.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주이시고, 주님이시며, 구주이십니다.3

지상 성역

하나님의 아들이요, 독생자이셨던 그분께서는 필멸의 생을 시작하기 위해 아버지의 해의 왕국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노래했으며 박사들이 와서 선물을 바쳤습니다. 그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평범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누가복음 2:52)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열두 살 때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성전에서 학식 있는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분을 찾아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마리아가 그분을 책망하자,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2:4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분이 미래에 펼치실 성역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역은 요단 강에서 그분의 사촌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이 물에서 일어서실 때 성신이 비둘기의 형태로 임하였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선언은 그분의 신성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40일을 금식하셨고 그분이 부여받은 신성한 사명을 앗아가려는 악마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그 대적의 꾐에 그분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복음 4:7)고 대답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또다시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은 팔레스타인의 먼지 가득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자신의 소유라고 할 만한 집도, 머리를 베고 누울 곳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평화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관용과 사랑으로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태복음 5:40)

그분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던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소경이 앞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가 듣게 하고, 앉은뱅이가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셨으며, 그들은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같은 일을 행한 사람은 분명히 아무도 없습니다.

몇몇은 그분을 따랐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분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모반을 꾸몄습니다. 그분은 주님의 집에서 환전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파멸시키려고 계획하는 사람들과 결탁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사도행전 10:38)

이것만으로도 그분을 영원히 기억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것만으로도 그분을 이 지상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과 유명한 말과 행동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니 그보다 더 위대하게 자리매김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분은 온 시대의 위대한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전능하신 분의 아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더 위대한 일들의 전주일 뿐이었습니다. 그 일들은 이상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찾아왔습니다.4

체포, 십자가에 달림 및 사망

그분은 배반당하여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커다란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 위에 그는 산 채로 못 박혔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분의 생명은 천천히 꺼져 갔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전에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분의 영혼이 떠나자 땅이 요동쳤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백부장이 엄숙하게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태복음 27:54)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분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분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그들은 시신에 옷을 입히고 그것을 … 새로운 무덤에 갖다 놓았습니다. …

그분의 친구들은 울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했으며 자신의 신성을 증거할 증인으로 불렀던 사도들도 울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했던 여인들도 울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삼 일 만에 일어나겠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전에는 없었던 일인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셔서 더 이상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낙담과 절망과 비탄의 처참한 느낌을 느꼈을 것입니다.5

부활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흘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돌이 굴러 내려져 있고 무덤이 열린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묘지 양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누가복음 24:5~7)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단순한 말은 모든 문학 작품에서 가장 심오한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 말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것에 관하여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이제껏 지상에 태어난 모든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 직면하는 질문, 즉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에 관한 응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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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를 가르치시는 그리스도

“그분의 메시지는 평화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관용과 사랑으로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고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유령이 아니었습니다.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생에서 실재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실재하셨습니다. 그분은 마리아에게 만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하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고, 또 주님께서 고통받던 시간에 틀림없이 우셨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껴안았을 때의 재회의 기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분은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함께 먹었습니다. 그분은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던 사도들을 만나 가르치셨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주님은 도마에게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도 놀라 그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8) 그분은 [또 다른 때]에 500명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증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동반자인 몰몬경입니다. 이 책은 그분께서 구대륙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신대륙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한복음 10:16)라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이 서반구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늘의 구름을 통하여 하강하실 때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다시 들리며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라,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그로 말미암아 내가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노라—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제3니파이 11:7)라고 엄숙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이 모든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이 경륜의 시대의 위대한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확실하고도 분명하며 솔직한 간증이 있습니다. 소년이었던 그는 숲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며 빛과 이해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나타나 조셉의 위 공중에 서 계셨는데 그분들의 찬란함과 영광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중 한 분이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시는데, 다른 한 분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조셉 스미스—역사 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조셉이 그후 다른 때에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는 아들의 영광을 보았고 그의 충만함을 받았더라. …

그리고 이제, 그에 대하여 드린 많은 간증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에 대하여 드리는 간증은 이러하니, 곧 그는 살아 계시다는 것이니라.”(교리와 성약 76:20, 22)6

의심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저는 주님의 상처난 손을 만지는 도마에게 주어졌던 말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는 말씀을 다시 전해 드립니다. 현세와 영원을 통하여 가장 위대하신 분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생애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구약의 여호와요 신약의 메시야이며 죽었다가 부활하였음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서반구를 방문하여 그곳의 주민을 가르쳤고, 이 마지막 복음의 경륜의 시대를 여셨다는 것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분이 살아 계심을 믿으십시오.7

2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속주이시고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전쟁을 하지만 적군과 아군이 항상 명확하게 나뉘지는 않습니다. …… 기독교인들 중에서조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음성이 그다지 유혹적이지 않거나, 그들이 미치는 영향이 폭넓지 않거나 그들의 의도가 그렇게 교묘한 것이 아니라면 주목받지 않을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부활절 아침을 맞이하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여러 곳에 모일 것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할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의 설교자들이 아름답고 희망에 찬 언어로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저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실제로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문자 그대로 아버지의 자녀임을 정말로 믿습니까?

여러분은 요단 강 위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고 선언하시는 하나님, 즉 영원하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음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바로 이 예수가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병약한 자를 되살리시고 죽은 자에게 삶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돌아가시고 요셉의 무덤에 매장된 후 삼 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사셨음을 믿습니까?

그분이 실제로 생명이 깃들고 인격을 갖춘 채로 여전히 살아 계시며, 그분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약속했던 바대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임을 진실로 믿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실제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점점 더 철학자들에게서 비웃음을 사고 있으며, 일부 교육자들로부터 조롱당하고, 그 수가 늘고 있는 성직자들과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이 “구식”이라고 치부하는, 그 세력이 줄고 있는 직역주의자입니다.

… 학식 있는 자들의 눈에는 유대의 평야에서 천사들이 찬양했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탄생,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기적들을 행하신 분, 무덤에서 일어나시고 승천하시며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 이 모든 것들이 미신처럼 보입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주님에게서 신성을 제거한 후에 왜 사람들이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가 하고 의아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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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길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과 함께 걸으셨다.

이 영리한 학자들은 예수에게서 신격을 없애고 그분을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의 한정된 사상에 적합하게 바꾸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그분과 하나님 사이의 신성한 부자 관계를 부정하고, 세상에서 그들의 적법한 왕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

이런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엄숙한 간증을 드립니다. 그가 생명을 갖고 계시지 않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 합리적인 믿음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성한 구속주라는 그분의 유일하고도 비할 곳 없는 위치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분과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대가를 치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이해와 열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더 높은 교육을 받거나 세상적인 지식을 얻는 것과 서로 상치되는 것은 아니나 철학 서적만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좀 더 단순한 과정에 의해서 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2:11 참조) 계시의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규칙을 따름으로써 주님에 대한 이해와 열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이 가운데 세 가지를 제언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 개념상 초보적인 것이며, 반복하기에 단조로울 정도이지만,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근본적인 것이며 그 결과는 매우 유익합니다. 

첫 단계는 주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십시오. 주님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말씀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비판하는 사람의 말씀을 무의미하게 만들 조용한 확신과 함께 그분의 말씀이 올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모든 나라에 자기를 나타내신다”(몰몬경 표제지)라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로서 나온 신세계의 성약인 몰몬경을 읽으십시오.

그 다음은 봉사, 즉 주님의 사업 안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의심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힘과 시간, 재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봉사하는 중에 여러분의 신앙은 자라나고 의심은 차츰 작아질 것입니다. …

셋째 단계는 기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이름으로 말씀하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며 그 약속은 확실합니다. 아마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은 듣지 못하겠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롭고 확실한 확신을 받을 것입니다. …

… 모든 철학의 혼란과 비판과 오늘날의 부정적인 신학을 뚫고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으로 태어나셔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세상의 구속주이자 왕 중의 왕으로서 통치하기 위하여 오실 주님이시라는 성령의 빛나는 증거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8

3

우리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저는 이천 년 전에 빌라도가 했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태복음 27:22)라는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진실로 우리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분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가르침을 우리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일부로 만들 수 있는가? …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그분의 가르침과 비할 곳 없는 모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의 삶은 진실로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고, 더 멀리 함께 가 주라는 가르침, 돌아온 탕자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또다른 수많은 가르침들은 시대를 거치며 만연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으로부터 친절과 자비를 끌어 내는 촉매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서는 잔인한 행위가 가득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곳에서는 친절과 관용이 지배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마땅히 서로 용서해야 하느니라. 이는 자기 형제의 과실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정죄 받음이니, 더 큰 죄가 그에게 머물러 있음이니라.”(교리와 성약 64:9) …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5~36) …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에 대해 배우십시오. 경전에서 그분에 대해 증거하는 부분을 찾아보십시오. 그분의 삶과 사명이라는 기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더 열심히 그분의 모범을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준수하십시오.9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반석, 곧 우리의 힘, 위안, 신앙의 중심으로서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앞날이 어떨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위대한 성취의 날이 올 테지만, 어떤 이에게는 낙담의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쁨과 즐거움과 건강과 은혜로운 삶일지 모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질병과 큰 슬픔의 날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압니다. 하늘의 북극성처럼, 미래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세상의 구속주께서는 우리 불멸의 삶의 닻으로 굳건히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 곧 힘이요, 위안이요, 신앙의 중심이십니다.

갤 때나 흐릴 때나,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은 늘 그곳에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시고 미소지어 주실 것입니다.10

승리한 나의 구속주

살아 계심을 아오니

고통과 사망 이기신

나의 왕 나의 구속주

신앙의 반석 인류의

밝은 빛 살아 계시니

사망의 휘장 너머로

더 좋은 길 밝히시네

주님의 영과 평안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의로운 길 걷는 신앙

영생으로 이끄시네11

학습 및 교수 제언

질문

  • 1편에 나오는 힝클리 회장의 간증을 되새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간증을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다. 여러분은 왜 구주의 성역과 속죄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가? 구주의 삶 중에서 여러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화와 가르침은 무엇인가?

  • 2편에 나오는 각각의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본다. 여러분이 한 대답은 매일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같은 편에서 힝클리 회장이 제시한, “하나님께 속한 것”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간단한 규칙”을 다시 살펴본다. 이 원리들은 어떻게 여러분의 영적인 이해력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 힝클리 회장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반복해서 질문했다.(3편) 우리는 그분의 대답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깊이 생각해 본다. 구주의 가르침과 모범의 영향이 없었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겠는가?

  • 힝클리 회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의 닻이 되심을 강조했다.(4편 참조)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구주의 힘과 위안을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 4편에 나오는 힝클리 회장이 작사한 찬송가의 가사를 한 줄 한 줄 깊이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의 “밝은 빛”이 되시는가? 그분은 어떻게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을] 밝[혀 주시는가]”?

관련 성구

누가복음 24:36~39; 요한복음 1:1~14; 사도행전 4:10~12; 니파이후서 2:8; 25:26; 앨마서 5:48; 교리와 성약 110:3~4

학습을 위한 도움말

“구주를 믿는 여러분의 신앙을 강화하[는] …… 학습 활동을 계획한다”(나의 복음을 전파하라 [2004], 22쪽) 예를 들면,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가르침이 내가 더욱 구주와 같이 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1. “그리스도의 상징”, 성도의 벗, 1976년 12월호, 3~4쪽.

  2. “신앙의 네 모퉁잇돌”, 리아호나, 2004년 2월호, 4쪽.

  3. 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1997), 280.

  4.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83쪽.

  5.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83~84쪽.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84~85쪽.

  7.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 성도의 벗, 1990년 4월호, 4쪽.

  8. Conference Report, Apr. 1966, 85-87.

  9. “What Shall I Do Then with Jesus Which Is Called Christ?” Ensign, Dec. 1983, 3–5.

  10.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101~102쪽.

  11. “승리한 나의 구속주”, 찬송가, 75장, 작사: 고든 비 힝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