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38 내가 정한 때, 내가 정한 방법으로


“내가 정한 때, 내가 정한 방법으로”,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38장

제38장: “내가 정한 때, 내가 정한 방법으로”

제38장

내가 정한 때, 내가 정한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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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범선을 타고 가는 두 남자

1889년 초, 조셉 딘은 사모아에서 가르칠 사람을 찾지 못해 분투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조셉과 그의 아내 플로렌스가 아우누우섬에 도착한 직후만 해도 선교 사업은 빠르게 진전되었고, 곧 섬에는 주일학교와 상호부조회가 구성된 지부를 설립할 수 있을 만큼 성도들이 늘어났다. 딘 가족과 사모아 성도들을 돕기 위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새로운 선교사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모아는 한참 내전 중이었다. 여러 파벌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사모아 전역에서는 위험한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왕은 교회를 반대했다. 후기 성도가 되기 위한 침례는 왕명에 따라 불법으로 규정되어 침례를 받으면 투옥될 거라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이제 침례를 요청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1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모아 성도들은 코코넛 잎으로 지붕을 엮고 백자갈과 조개껍질로 바닥을 깔아 집회소를 지었다. 플로렌스 딘은 남편과 같이 선교 사업을 하던 또 다른 여성인 루이자 리 자매와 함께 금요일마다 상호부조회 모임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 장로들은 사모아의 다른 섬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작은 범선 한 척을 구입했다. 그들은 새로 산 배를 Faa‘aliga[파알리가]로 명명했다. 이는 사모아어로 “계시”를 뜻했다.2

1888년이 끝나 갈 무렵, 조셉과 플로렌스, 그들의 어린 아들, 그리고 몇몇 선교사들은 아우누우를 떠나 이웃의 더 큰 섬인 투투일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투투일라에는 인구가 적었고, 그곳의 남자들은 대부분 참전을 위해 집을 떠나 있었다.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얼마 후 조셉은 자신과 선교사들이 이제 더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폴루섬으로 가서 사모아의 행정과 무역의 중심지인 아피아에 가 보기로 했다.3

조셉은 우폴루에서 미국 영사와 접촉하여 왕이 성도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었다. 또한, 그는 하와이인 선교사인 키모 벨리오가 약 25년 전에 침례를 준 이포포라는 남자도 찾고 싶었다. 이포포는 조셉에게 벌써 두 통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는 자신이 사는 섬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힘을 보태 줄 선교사들을 빨리 만나고 싶어 했다.4

3월 11일 밤, 조셉은 두 동반자인 에드워드 우드와 애들버트 비슬리와 함께 우폴루까지 112킬로미터가량의 항해 길에 나섰다. 항해 경험이 부족한 세 사람이 그 작은 배로 위험이 도사리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는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셉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 길을 가기를 바라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교사들은 하룻밤의 힘겨운 항해 끝에 우폴루에 다다랐다. 그러나 해변이 가까워졌을 무렵, 뜻밖에 강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그 바람에 배가 기울어 순식간에 배 안으로 물이 들어찼다. 선교사들은 바로 옆에서 파도에 떠다니는 노와 상자, 짐가방들을 붙잡아 보려 애를 썼다. 그러던 중 약 400미터 거리에 있는 다른 배 한 척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선교사들이 크게 소리치며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 소리를 내자 마침내 그 배가 이쪽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모아인들은 선교사들을 구하러 와 주었다. 그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배를 바로잡고, 파도를 뚫고 돛과 닻을 건져다 주었으며, 선교사들의 물건들도 찾아주었다. 조셉은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사례를 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사모아인들은 조셉이 내민 손을 붙잡고 다정히 악수를 나누었다. 조셉은 주님께 그들을 축복해 주시도록 간구했다.

조셉과 동반자들은 기진맥진한 몸으로 아피아에 도착했다. 선교사들은 여정 동안 자신들을 보호해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 후로 며칠에 걸쳐 미국 영사와 이포포를 찾아 곳곳을 다녔다.5


한편, 유타에서는 스물아홉 살의 로레나 라슨이 네 번째 아기가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벤트는 불법 동거 혐의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얼마 전 복역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로레나는 그와 복수결혼을 한 아내였으므로, 그녀의 임신 사실은 벤트가 또다시 법을 어겼다는 증거로 쓰일 우려가 있었다. 로레나는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지하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6

처음에 그녀는 맨타이 성전에서 봉사하며 숨어 지내기로 했다. 성전은 그녀의 집이 있는 유타 먼로에서 95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었고, 마침 그녀의 와드도 성전 봉사자로 나갈 사람이 필요했다. 로레나는 맨타이로 거처를 옮긴 후 한동안 성전에서 봉사하며 지냈으나, 벤트와 다른 가족들에게 자식들을 맡기고 떨어져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로레나는 한 차례 유산할 고비를 넘긴 뒤, 성전 회장인 대니얼 웰스에 의해 명예롭게 해임되었다.7

그런 다음, 로레나와 벤트는 그녀와 자녀들을 위해 먼로와 맨타이 중간에 있는 레드먼드라는 마을에 집을 얻기로 했다. 밀고자들이 곳곳에 있었기에 로레나는 신원을 숨겨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은 이제부터 해나 톰프슨이며, 아버지가 보러 오면 그를 “톰프슨 삼촌”으로 불러야 한다고 일러두었다. 로레나는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밝히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8

그녀는 가족과 함께 레드먼드에 도착한 뒤로 공공장소에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오후, 가까운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모이는 자리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자매들은 로레나의 두 살배기 딸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가 “톰프슨 삼촌”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며 로레나에게 전해 주기도 했다.

레드먼드의 친절한 성도들은 로레나의 가족에게 지체 없이 봉사의 손길을 내밀었다. 부활절 일요일에는 집 문간에 신선한 달걀 한 바구니와 버터 한 덩어리가 놓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로레나는 먼로에 있는 자신의 집이 그리웠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낯선 마을에서 홀로 세 아이를 돌보느라 매일매일 고투하고 있었다.9

그러던 어느 날 밤, 로레나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그 꿈에서 먼로에 있는 자신의 집을 보았다. 그녀의 집 잔디밭은 야생 덤불과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폐허가 된 집을 보고 가슴이 아팠던 로레나는 곧장 뜰로 가서 잡초를 뽑았다. 막 뿌리 깊은 잡초들을 뽑기 시작하던 중, 그녀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 나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하생활 중에 자란 나무 또한 아주 좋은 열매를 내느니라.”

꿈은 곧 로레나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장성한 자녀들이 접시와 우묵한 그릇, 자잘한 바구니 여러 개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함께 맛있는 열매로 그릇들을 채운 뒤 그것들을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중에는 로레나의 후손들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로레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감사함이 넘치는 가운데 잠에서 깨어났다.10


조셉 딘과 그의 동반자들은 아피아에 도착한 직후 사모아 주재 미국 부영사인 윌리엄 블랙록을 만났다. 선교사들은 그에게 사모아인 후기 성도들을 옥에 가둔다는 소문의 진위 여부를 물었다. 그러자 부영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단순한 엄포일 뿐입니다.” 전쟁 중인 파벌 간에 맺은 조약 덕분에, 사모아의 국민은 각자가 원하는 대로 예배할 수 있었다.11

그러나 전쟁의 위협은 살기등등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피아 항구에는 일곱 척의 군함이 정박해 있었는데, 그중 세 척은 독일군, 또 다른 세 척은 미국군, 그리고 나머지 한 척은 영국군 소속이었다. 각 국가는 태평양에서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결의를 불태웠다.12

이제 선교사들은 이포포를 꼭 찾아내고 싶어 이번에는 그가 산다는 사모아의 동쪽 끝 마을인 살레아아우무아로 배를 타고 갈 계획을 세웠다.13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아피아에 폭풍이 불어닥쳤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크고 사나운 파도가 일자 조셉과 동반자들은 몸을 피할 곳을 찾아 부리나케 뛰었다. 그들은 그 지역 상점 주인의 헛간 위 다락으로 피신했지만, 곧 그 허물어질 듯한 건물이 큰 폭풍을 맞고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건물이 주저앉을 것만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폭풍은 더욱 격렬해졌다. 선교사들은 창가에 서서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항구에 정박한 커다란 군함들을 강타하는 광경을 겁에 질린 채 지켜보았다. 그때, 한 군함의 갑판에 거대한 파도가 부딪치면서 거기 있던 사람들을 바다로 모조리 휩쓸어갔다. 또 다른 군함에서는 급히 돛대에 올라 거미처럼 밧줄에 매달려 돛을 조정하려 하는 선원들이 있는가 하면, 안전한 곳으로 헤엄쳐 가기 위해 으르렁대는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다. 군함은 해변에서 겨우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정박해 있었지만, 선교사들로서는 선원들을 도울 길이 전혀 없었다. 조셉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비를 구하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14

폭풍이 지나간 뒤, 해변에는 군함의 잔해와 파편이 널브러져 있었고, 폭풍우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약 200명에 달했다.15 선교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바다로 나가기가 조심스러웠다. 강한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는 계절이면 언제든 예고 없이 또 다른 폭풍이 불어닥칠 수 있었다.16 그러나 선교사들은 두려움을 내려놓고 이포포를 찾아 살레아아우무아로 배를 움직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여러 명의 사모아인이 배를 타고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을 이포포라고 소개했다. 이포포는 과연 새로운 선교사들이 자신의 섬에 올 날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으면서도 20년간 한결같이 회복된 복음에 대한 간증에 충실하게 살아 왔다. 이제, 조셉과 그의 동반자들이 도착했으니 축하를 할 시간이었다. 선교사들은 이포포의 아내인 마탈리타를 만나 구운 돼지고기와 과일로 차린 만찬을 들었다.17

그 후로 며칠 동안 그들은 이포포의 친구와 이웃들을 알아 갔다. 한 모임에서는 조셉의 말을 듣기 위해 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그곳에 강한 영이 그들과 함께했다. 사람들은 복음을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며 진심을 담아 질문했다.

어느 날 오후, 이포포와 선교사들은 가까운 개울로 나갔다. 이포포는 이미 침례를 받았으나 긴 세월이 흘렀으므로 다시 침례를 받고 싶다며 그들에게 부탁했다. 조셉은 새 친구 이포포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 이어서 이포포는 물가에 무릎을 꿇었고, 선교사들은 그를 교회의 회원으로 확인해 주었다.

며칠 뒤 바람이 바뀌면서, 조셉과 동반자들은 투투일라로 돌아가기 위한 항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포포는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암초 너머까지 그들과 동행했다. 작별할 시간이 되자, 그는 선교사 한 명 한 명과 코를 맞대며 사모아식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을 보내 주었다.18


1889년 봄, 로레나 라슨의 남편인 벤트는 연방 보안관들을 피해 이웃의 콜로라도주로 가기로 결정했다. 콜로라도주는 에드먼즈-터커 법이 적용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줄리아는 나머지 가족과 함께 먼로에 남을 수 있었다. 벤트는 자신이 콜로라도에 안착하여 전갈할 때까지는 로레나와 그녀가 낳은 자녀들이 로레나의 오빠와 함께 유타에 머물기를 바랐다.19

그러나 로레나는 그 계획이 내키지 않았다. 로레나는 자신의 오빠가 형편이 좋지 않으며, 올케도 최근에 장티푸스에 걸려 고역을 치렀다는 것을 남편에게 환기시켰다. 그들은 로레나와 로레나의 아이들을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임신 막달에 접어든 로레나는 남편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벤트도 그에 동의하여, 로레나와 그들의 자녀들은 얼마 후 벤트와 함께 콜로라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콜로라도까지는 사막을 건너고 산을 넘어 800여 킬로미터를 가야 했다. 콜로라도로 가는 길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고,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들도 어딘가 위험해 보일 때가 많았다. 한번은 바위투성이 산비탈에 있는 웅덩이에 고인 물 말고는 마실 물이 아예 없었던 적도 있었다. 벤트가 물을 찾아다니는 사이, 로레나는 어둠 속에서 남편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하려고 간간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협곡을 따라 천천히 마차를 몰아야 했다.

로레나는 마침내 콜로라도 샌퍼드에 도착하자 마음 깊이 감사를 드렸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성도들의 작은 마을에 합류했다. 출산이 임박해 왔을 때, 로레나는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얼마나 혹독한 진통을 겪었는지, 그녀가 그러다 죽지 않을까 걱정한 이가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8월 22일에 로레나는 아들 이넉을 낳았다. 산파는 26년간 자신이 받은 아이 중에 이렇게 큰 아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20

한편, 교회에 타격을 주기 위해 계획된 법률과 관행들은 라슨 가족과 같은 가족들을 계속 압박해 왔다. 복수결혼을 하지 않은 성도들조차 그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아이다호준주의 입법부에서는 한 법률이 통과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투표권을 행사할 사람은 일부다처제를 가르치거나 장려하는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음을 맹세해야만 했다. 유권자 개인이 복수결혼을 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법이 발효되자, 정부는 아이다호의 모든 성도, 즉 아이다호 인구 4분의 1에 가까운 사람이 투표를 하거나 관직에 오르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취지로, 정부의 관리와 판사들은 미국으로 온 후기 성도 이민자들을 차별하며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조치의 합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송들이 미국의 사법체계를 따라 진행되었지만, 교회에 대한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고, 교회에 유리한 판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에서 에드먼즈-터커 법이 통과된 직후, 교회의 변호사들은 이 법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성도들은 대법원이 그 법안을 폐지해 줄 것을 기대했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이 소송 건에 대한 심리가 시작되었는데, 성도들은 아직 나오지 않은 그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21

샌퍼드처럼 외진 곳에 사는 로레나도 정부가 계속 이렇게 성도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족과 교회는 영영 흩어진 채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2


라슨 가족을 비롯한 교회의 회원들이 가족을 지키고 신앙을 행사하기 위해 “지하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회장단은 성도들의 종교의 자유를 지킬 새로운 방안들을 찾고 있었다. 윌포드 우드럽은 워싱턴 D.C.에서 협력자를 구하여 결국에는 유타를 주로 승격시키고 말리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는 후기 성도들이 발행하는 신문의 편집인들에게 더는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의 기사를 싣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교회를 비판하는 정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복수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도록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촉구했다. 로건 성전의 회장에게는 주님의 집에서 복수결혼이 집행되는 것을 중단하도록 요청했다.23

이렇게 새로운 정책들이 시행되자, 새로 복수결혼을 하는 성도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는 복수결혼은 이미 가르침 받은 원리이므로 계속 그것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멕시코나 캐나다로 가도록 권고되었다. 그런 지역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미국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비공개적으로 복수결혼을 집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타준주에서도 드문드문 복수결혼이 집행되는 일이 있었다.24

1889년 9월, 윌포드 우드럽과 조지 큐 캐넌은 솔트레이크시티 북부의 성도들을 방문하던 중 한 스테이크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복수결혼을 시작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성전 추천서를 발급해 주어야 할지를 문의했다.

윌포드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곧바로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성도들이 미주리주 잭슨군에서 성전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도 반대가 극심하여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때를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헌신을 받아 주셨고, 성전을 짓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결과는 성전 건축을 막은 자들이 감당할 몫으로 돌아갔다.

윌포드는 말했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와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 문제의 결과는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이 과정을 택한 이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스테이크 회장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유타준주에서 이런 방식의 결혼을 시행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뒤 윌포드는 조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캐넌 회장님이 계십니다. 캐넌 회장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조지는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윌포드가 이 사안에 관해 이렇게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인 데다가, 과연 자신이 그 말에 동의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유타준주에서 복수결혼의 집행을 중단해야 하는가? 조지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윌포드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대화가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지가 자신의 일지에 이 대화를 기록한 것에 따르면, 나중에 그는 윌포드의 말을 두고 거듭해서 고심을 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 그것은 대단히 무거운 질문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에, 열쇠를 지닌 분이 이처럼 말씀하신 것은 처음이다.”25


앞으로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질문들이 늘어 가는 가운데, 수사 게이츠는 1889년 10월에 Young Woman’s Journal『영 우먼스 저널』의 창간호를 냈다.

몇 달 전에 그녀는 제이컵과 함께 유타로 돌아온 뒤 자신이 낼 잡지에 대한 홍보를 시작했었다. 6월에 수사의 언니이자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 회장단의 보좌인 마리아 두걸도 솔트레이크 스테이크의 젊은 여성들에게 이 새로운 잡지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고, 잡지에 글을 기고해 줄 것을 독려했다. 몇 달 뒤, 몇몇 신문에 곧 수사의 잡지가 나온다는 소식이 실렸다.26

수사도 여러 후기 성도 작가들에게 잡지에 시와 산문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성도들은 『우먼스 익스포넌트』, Juvenile Instructor『주버나일 인스트럭터』, Contributor『컨트리뷰터』와 같이 교회가 지원하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여러 해 동안 글쓰기 재능을 연마해 왔다. 유럽의 성도들 또한 영국 선교부의 『밀레니얼 스타』, 스칸디나비아 선교부의 Skandinaviens Stjerne『스칸디나비안 스티에네』와 Nordstjarnan『노드스탸르난』, 스위스-독일 선교부의 Der Stern『데 스텐』에 글을 기고했다.27

성도들은 이런 글을 가리켜 “가정 문학”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브리검 영이 내세웠던 “가내 공업”이나 설탕, 철, 명주와 같은 현지 생산 제품 등을 떠올리게 했다. 1888년에 전한 설교에서 올슨 휘트니 감독은 성도들이 지닌 가장 훌륭한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가정 문학 작품을 더 많이 쓰도록 교회의 젊은이들을 독려했었다.

“신문과 잡지를 위해, 특히 우리가 펴내는 가정 출판물을 위해 글을 쓰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책을 만드십시오. 이렇게 나오는 책은 여러분과 여러분이 속한 나라와 국민에게 영예가 될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도 유익과 혜택을 안길 것입니다.”28

수사는 『영 우먼스 저널』 창간호에 조지핀 스펜서, 루비 러몬트, 룰라 그린 리차즈, 엠 에이 와이 그린핼시, 그리고 친자매인 루 돌턴과 엘런 제이크먼을 포함하여 교회의 유명 작가들 중 몇 사람이 쓴 가정 문학 작품을 실었다. 또한, 수사가 직접 쓴 글 몇 편과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 회장단의 서신, 그리고 로메니아 프랫이 건강과 보건을 주제로 쓴 칼럼도 창간호를 장식했다.29

이 잡지에 쓴 첫 번째 사설에서, 수사는 머지않아 교회에 속한 전 세계 젊은 여성들의 글을 『영 우먼스 저널』에서 다루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여성들이여, 기억하자. 이것은 여러분의 잡지다. 이 잡지의 영향력이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런던에서 샌드위치제도까지 확장되게 하자.”30


그해 가을, 유타의 연방 판사는 유럽에서 온 여러 이민자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후기 성도이니 미국에 충성하지 않으리라는 그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에 반감을 품은 회원들은 성도들이 정부에 반대하며 성전에서 정부에 적대적인 맹세를 했다고 주장했다. 지방 검사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하던 시기의 설교들을 인용했다. 이러한 설교는 마지막 날과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교회의 다른 가르침들과 더불어, 성도들이 정부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증거로 채택되었다.31

윌포드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맞서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전과 관련된 내용을 말하지 않기로 엄숙히 성약을 맺었기에, 성전에 관한 언급에 대응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32

윌포드는 11월 말에 변호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법정에 제출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교회가 이제는 복수결혼을 엄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윌포드가 공식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윌포드는 변호사들의 요청에 어떻게 응할지 확신이 없었다. 교회에 적대적인 세력을 달랠 목적으로 그런 조처를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일까? 윌포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할 시간이 필요했다.33

밤이 되어서야 변호사들과 헤어진 윌포드는 몇 시간에 걸쳐 앞으로 할 일을 상고하며 기도로 인도를 구했다.34 그와 성도들은 시온을 건설하여, 평화롭고 안전한 그 울타리 안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을 또 다른 기회를 찾아 1847년에 솔트레이크밸리에 왔다. 그러나 40여 년이 흐른 지금, 교회의 반대자들은 가족을 찢어 놓고, 여성과 남성들에게서 투표권을 빼앗으며, 이주와 집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단지 교회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머지않아 성도들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성전도 그중 하나일 터였다. 그렇다면, 휘장 이편과 저편에 거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구원과 승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윌포드의 기도에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세상의 구주인 나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네가 사는 세대에 관하여 내가 밝히고 약속하였으며 명한 모든 일이 일어날지니, 아무 권능도 나의 손을 막지 못하리라.”

정확히 해야 할 바를 알려 주신 것은 아니었지만, 구주께서는 성도들이 영을 따른다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구주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분은 너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 나 주는 내가 정한 때, 내가 정한 방법으로 사악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나의 성도들을 건져 내리라.”35